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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입하

by 황토 땅지기 19학번 김세현 2021. 8. 9.

어쩌다 호캉스

입하(立夏)

옥우진

 

 

 

   마지막으로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지퍼를 잠글 때 또다시 벽 안에서 날갯짓 소리가 났다. 속으로 작은 비명을 지르며 집을 서둘러 나왔다. 개강 시즌에 맞춰서 급하게 지어진 오피스텔의 하자가 점점 드러나고 있다는 건 최근에 알게 된 일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건물 외벽 쪽의 단열재가 떨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벽과 단열재 사이에 공간이 생겨 소음이 타고 올라오는 건 물론이고, 최근에는 그 안에서 벌레의 것이 분명한 소리까지 들려오기 시작했다.

 

   벌어진 벽과 벌레 소리를 담은 동영상을 보내자 집주인은 꽤 빨리 시공 일정을 잡아주었고, 벽을 뜯어내는 중인 집에서 살 순 없었기에 공사 기간 동안 근처의 호텔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호캉스가 유행인 것은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급작스럽게 보내질 줄은 몰랐다. 집에서 15분 거리의 애매한 호텔에서 일상의 일을 지속한 상태로 있는 게 과연 휴가인가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왕 지난한 집안일에서 해방된 것 즐기고 오자고 맘을 먹었다.

 

   공사는 3일이었고 감자는 둘째 날에 오기로 했다. 감자와 나는 내일로 두 번째 만나는 사이였다. 그러니까 감자를 호텔에 초대한 것은 꽤 파격적인 일이었다. 감자를 떠올리면 강원도 게스트하우스의 자유스러운 밤이 따라왔다. 감자와 함께 있으면 집에서 15분 거리의 호텔도 이국의 휴양지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감자가 보내온 사진은 책상 앞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붙여져 있었다. 휴양지의 어설픈 술집에서 어설프게 웃고 있는 나의 옆얼굴. 그리고 내가 감자에게 자못 비밀스럽게 알려준 속초의 작은 찻집. 감자는 뱉은 말은 꼭 이뤄냈다. 감자의 실현은 끈기와 의무라기보다 당위에 가까웠다. 우리 그러기로 했잖아, 하는 명쾌함 같은 것.

 

   밥 한번 먹자, 하는 한국인의 공허한 약속에 지친 나는 감자가 신기하기까지 했다. 게스트하우스의 짧은 인연에게 정말로 시간을 들여 사진을 보내고, 스치듯 추천해 준 가게에 정말 가보는 사람. 그래서 나는 내가 감자와 재회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품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감자가 헤어지며 말한 우리 또 만나, 하는 명쾌한 약속 때문에, 혹은 감자가 그저 감자였기 때문에.

 

 

   익숙한 번호의 버스를 타고 호텔에 도착했다. 마실 삼아 나오던 동네에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자니 여간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이 모습으로 어설프게 호텔 로비로 들어서면 정말로 관광객으로 보일 것 같아 웃음이 났다.

    객실은 생각보다 더 깔끔하고 풍경이 좋았다. 화물선이 지나다니는 바다가 보였고, 호텔을 제외한 주변 건물이 모두 낮아 시야가 환하게 트였다. 이 풍경을 보면서 노트북을 두드리면 매일 하던 작업도 꽤 신선하게 느껴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객실의 작은 데스크에 노트북을 세팅하고, 책 몇 권을 올려두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감색 다이어리를 끼워두었다.

 

   집을 나오기 직전에 다이어리를 챙긴 건 충동에 의해서였다. 작년에 쓴 것이 마지막인 다이어리를 왜 가방에 넣고 싶었는지 스스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다이어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이어리를 호텔 데스크에 버젓이 올려두며 나는 그것이 감자에게 무언가를 발각당하고 싶어서였으리라는 어렴풋한 이해에 도달했다.

 

 

   

   감자를 처음 만난 것은 올해 초의 강원도 게스트하우스에서였다. 게스트하우스 저녁 파티에서는 닉네임을 쓰는 것이 원칙이었다. 처음으로 소개를 하게 된 감자는 돌연 앞에 놓인 찐감자 접시를 집어 들고 자신을 감자라고 소개해 사람들을 깔깔거리게 만들었다. 강원도라고 감자라니, 일차원적인 연결이 웃겼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소개를 뱉을 수 있는 감자의 용기가 부럽기도 했다.

 

   나는 딱히 나와 연관된 키워드로 닉네임을 만들기 싫어 게스트하우스의 이름을 따 메밀로 닉네임을 지었는데, 그 덕에 감자와 나는 사람들에 의해 구황작물 콤비로 엮이게 되었다. 열댓 명 정도가 모인 파티에서 감자와 나는 꽤 오랜 시간 둘만 대화를 나눴다. 그날 처음 본 사이였지만 어쩐지 대화가 편했고 취미가 잘 맞았다. 우리는 심지어 같은 방이었고 그날 밤 고등학생들처럼 게스트하우스의 통금을 어기고 탈출해 밤새 술을 마셨다.

 

   다음날 감자는 속초로 떠난다고 했고, 우리는 서로 아쉬움의 눈길을 주고받으며 인스타그램 친구를 맺었다. 그때서야 알게 된 김지유, 하는 감자의 본명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과 밤새 그렇게 신나게 이야기를 했다니. 그 이후로 감자를 다시 만난 적은 없었다. 감자가 우편으로 사진을 보내온 일을 제외하고는 서로 간간이 인스타그램 게시글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가끔 메시지를 보내는 사이, 그 정도의 느슨한 연결이 다였다.

 

   그래서 호텔에 갑자기 가게 되었다는 스토리에 좋겠다는 메시지가 온 감자에게 올래? 하고 물으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감자는 딱히 당황한 내색도 없이 흔쾌히 온다고 했고, 그래서 나는 반 년만에 다시 감자와 이틀 밤을 보내게 된 것이었다.

   내일이 기대된다는 감자와 메시지를 나누고 업무를 처리하다보니 어느새 노을이 졌다. 호텔의 통창 밖으로 보이는 바다와 노을이 감격스럽게 아름다웠다. 사진을 찍어 감자에게 전송할까 하다가 내일 직접 보여주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눈에만 담았다. 노을을 배경삼아 가져온 책을 들고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침대는 쾌적했고 어느새 진 노을을 야경이 채우고 있었다. 졸음이 몰려와 책을 두고 누우며 문득 삶이 꽤 충만하다는 생각을 품었다.

 

 

 

   감자는 로비에서 나를 보자마자 메밀, 하고 외치며 달려왔다. 여름옷을 입은 감자는 처음이었지만 이번에도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우리는 오랜 친구처럼 로비에서 호들갑을 떨고는 객실로 올라왔다.

   감자는 강원도의 첫 만남처럼 이번에도 장비를 잔뜩 가지고 있었다. 프리랜서 사진가인 감자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것이 일이었다. 이번에도 내가 일하는 시간 동안은 근방의 사진을 찍으러 다니겠노라고 말했다. 나는 해지기 전엔 꼭 호텔로 오라고,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고 당부했다. 노을을 보고 상기된 표정으로 셔터를 눌러댈 감자가 떠올라서 즐거워졌다.

 

 

 

   해가 슬슬 떨어져갈 때 감자가 돌아왔다. 감자는 즐거워 보였다. 새로운 풍경이 너무 많았다며 카메라의 스크린을 넘기며 내게 시선을 잔뜩 보여주었다.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감자는 내가 상상했던 꼭 그 표정으로 셔터를 눌러댔다. 감자는 바라는 만큼 예측 가능했고 바라는 것 이상으로 예측 불가능했다. 감자와 있으면 느끼는 그 안정적 스릴이 즐거웠다.

 

   감자는 카메라를 내 눈앞에 대며 뷰파인더로 보는 노을은 또 다르다며, 내 손가락을 셔터 위에 올려주었다. 감자의 말처럼 뷰파인더 속 노을은 더 웅장하고, 하지만 작고, 가까워 보이진 않지만 예술 작품 같은 아우라가 느껴졌다. 그대로 노을을 몇 장 찍다가 카메라를 돌려 감자를 찍었다. 노을빛에 물든 감자가 뷰파인더 속에 담겼다.

 

 

   감자는 장비를 정리하다가 데스크 위의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감자는 다이어리 멋지다, 하고 말했고 나는 충동적으로, 어쩌면 계획적으로 볼래? 하고 물었다. 감자는 그 초대가 꽤 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이어리를 넘기기 시작했다.

 

   감자는 글씨가 꾹꾹 눌러써져 우글거리는 다이어리를 아주 천천히 넘겼다. 장이 넘어갈수록 감자는 더 느려졌다. 침대에 걸터앉아 다이어리를 넘기는 감자의 옆얼굴은 잠잠했다. 나는 순간 습관적인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이내 뷰파인더 속 노을빛 감자가 떠올랐고 이유 없이 마음이 진정되었다.

 

   다이어리를 끝장까지 넘기고 나서 감자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펜을 들고 다이어리를 가리키며 써도 돼? 하고 물어왔다.

 

 

    감자로부터 건네받은 다이어리를 나는 아주 꼭꼭 씹어서 읽었다. 저녁 시간임에도 밖은 여젼히 더웠고 여름 특유의 잔열이 객실에 맴돌았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메리 크리스마스, 하는 감자의 입김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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