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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에 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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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6

프롤로그 프롤로그 김세현 이맘때쯤엔 꼭 재작년 용능을 떠올린다. 여름의 기억은 원래 그렇다. 끈적끈적하고, 변덕스럽고, 정신이 혼미하고, 어쩐지 찬란해 보이고. 기억은 화상처럼 새겨지되, 타투처럼 그럴듯하게 남는 것이다. 재작년에 온 남자의 마지막 메시지를 대화로 이어붙일 생각도 못 하고 망연히 보는 것 또한 용능을 떠올리는 일의 일부였다. 맨 처음 대화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스크롤을 끌어올리다 괜히 약 올라서 샛노란 메신져 창을 닫아버렸다. 누구 말마따나 객지에서의 추억은 객지에 매어두고 와야 하는데. 당장 내일은 출근이다. 또, 취업계 학생도 예외 없이 성적 주기로 유명한 박 교수님 계절 레포트도 슬슬 준비해야 하고. 정신없는 유월의 막바지였다. 참자, 좀만 참으면, 휴가 기간이다. 나는 방송 콘텐츠를 프로모션.. 2021. 8. 9.
샤이닝, 글리밍, 스파클링 샤이닝, 글리밍, 스파클링 유예지 https://youtu.be/bhGIKHQUuWY 우리가 강원도에 간 건 다분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그냥, 여름이었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고, 그렇게 해도 되는 나이였고, 학기 중에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죽을 둥 살 둥 일하며 번 돈이 통장에 차질 없이 입금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제이와 나는 같은 단과대, 다른 과에 재학 중이었는데, 각자 좋아하는 작품의 소묘를 그리고 파트너의 그림을 대신해 발표하는 미술 교양 조별 과제에서 우연히 같은 조가 됐다. 우리는 군대에서 막 돌아온 복학생으로, 매우 불성실했고, 제이의 그림 실력은 형편없었으며, 까칠하기로 유명한 대머리 교수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나는 제이가 연필을 잡고 종이에 무언가를 그리는 순간 재수강을 확신했고, 기.. 2021. 8. 9.
입하 입하(立夏) 옥우진 마지막으로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지퍼를 잠글 때 또다시 벽 안에서 날갯짓 소리가 났다. 속으로 작은 비명을 지르며 집을 서둘러 나왔다. 개강 시즌에 맞춰서 급하게 지어진 오피스텔의 하자가 점점 드러나고 있다는 건 최근에 알게 된 일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건물 외벽 쪽의 단열재가 떨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벽과 단열재 사이에 공간이 생겨 소음이 타고 올라오는 건 물론이고, 최근에는 그 안에서 벌레의 것이 분명한 소리까지 들려오기 시작했다. 벌어진 벽과 벌레 소리를 담은 동영상을 보내자 집주인은 꽤 빨리 시공 일정을 잡아주었고, 벽을 뜯어내는 중인 집에서 살 순 없었기에 공사 기간 동안 근처의 호텔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호캉스가 유행인 것은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급작스럽게 보내.. 2021. 8. 9.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하여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하여 권지민 휴일에 집에 안 있고 밖에만 돌아다니면 월세가 아깝지 않냐는 말을 친구에게 했을 때, 친구는 그저 우스갯소리로만 알아듣고 크게 웃었다. 웃기려고 한 말은 아니었고 진심으로 한 말이라 좀 머쓱해졌다. 이번 방학에도 집에 있는 것 외에는 대단한 계획은 없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을 예정이었다. 새벽까지 휴대폰을 보다가 오후 두 시에 일어나 버린 나를 보고 엄마가 가엽다는 듯이 보다가 말했다. 이번 방학에는 집에만 있지 말고 어디라도 갔다 와. 어디라도, 라니 막연하기도 했다. 나는 그 말을 흘려들으려고 했는데 엄마는 바로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모가 사는 곳은 경기도였는데 정확한 지역은 내 기억에 없었다. 엄마는 이모도 괜찮다고 했으니 다음 주.. 2021. 8. 9.
이방인 이방인 임은지 https://youtu.be/f_xPWhYu2H4 갑자기 33℃까지 올라간 기온에 기운이 쭉 빠져 해류에 휩쓸린 해파리처럼 동료들 사이에서 흐느적거린다. 나와는 달리 기운 좋게 떠들고 있는 동료들을 흐리멍텅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켠다. 산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금세 다 마신 건지 커피가 아니라 커피 향 공기만 빨대를 타고 올라온다. 한숨을 내쉬고는 테이크아웃 잔 뚜껑을 열고는 반쯤 녹은 얼음을 입에 털어 넣는다. “산호 씨는?” 갑자기 이름이 불리며 시선이 쏠린다. 입에 문 얼음을 뱉을 뻔한 것을 겨우 참고는 날 부른 동기를 보며 어색하게 웃는다. 다들 신나게 대화하고 있는데 나만 입을 다물고 커피만 빨아 마시고 있으니 이상하게 느껴져 부른 것일 테지만, 지.. 2021. 8. 9.
실은 제가 고백할게 있는데요 실은 제가 고백할게 있는데요 허진 https://youtu.be/cefCdPe-U0Y 제가 예전에 방콕에 갔던 적이 있어요.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는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다. 스물두 살 무렵, 삼촌이 아는 사람을 만나러 태국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함께 가게 해달라, 경비는 내가 대겠다, 왔다 갔다 비행기만 함께 타고 그 후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사정한 끝에 나는 삼촌과 동행할 수 있었다. 알아서 하겠다고 큰소리를 쳐뒀지만, 정작 돈이 얼마 모자라 적금을 해지할 생각이었다. 삼촌은 눈치껏 지인에게 나의 숙박까지도 부탁해줬다. 덕분에 나는 무언가에 쫓기듯 다급했던 마음을 조금은 내려놓은 채 떠날 수 있었다. 내가 삼촌의 일정에 따라가고 싶었던 이유는, 그러니까…, 난 그맘때 한 부분이 결여된 .. 2021.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