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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프롤로그

by 황토 땅지기 19학번 김세현 2021. 8. 9.

있을 법한, 용능

프롤로그

김세현 

 

    이맘때쯤엔 꼭 재작년 용능을 떠올린다. 여름의 기억은 원래 그렇다. 끈적끈적하고, 변덕스럽고, 정신이 혼미하고, 어쩐지 찬란해 보이고. 기억은 화상처럼 새겨지되, 타투처럼 그럴듯하게 남는 것이다. 재작년에 온 남자의 마지막 메시지를 대화로 이어붙일 생각도 못 하고 망연히 보는 것 또한 용능을 떠올리는 일의 일부였다. 맨 처음 대화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스크롤을 끌어올리다 괜히 약 올라서 샛노란 메신져 창을 닫아버렸다. 누구 말마따나 객지에서의 추억은 객지에 매어두고 와야 하는데. 당장 내일은 출근이다. 또, 취업계 학생도 예외 없이 성적 주기로 유명한 박 교수님 계절 레포트도 슬슬 준비해야 하고. 정신없는 유월의 막바지였다. 참자, 좀만 참으면, 휴가 기간이다.

 

   나는 방송 콘텐츠를 프로모션하는 중견기업에 신입 마케터로 운 좋게 입사할 수 있었다. 공모전 수상이력, 참여했던 대외활동 등 모든 경험을 끌어다 자소서에 냅다 들이부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면접관의 맘을 사로잡은 건 펜션에서 반년 좀 넘게 근무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홍보학관데 뭐라도 해보라는 펜션 사장님의 성화에 못 이겨 대충 만들어 유튜브에 올린 펜션 홍보 영상은 나의 적극성을 보여주는 포트폴리오가 되었고, VOD로 시간을 메우다 웬만한 OTT에 빠삭해진 지식은 귀사에 가진 관심도를 뽐내는 데 사용됐다. 더해 객지에서 서비스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나를 밝고 당찬 인물로 보이게끔 만들어 면접 땐 펜션 알바에 관련한 질문이 집요하게 들어왔다. 물론 이야기 대부분이 가공됐지만, 베이스는 거짓이 아니니 책잡힐 건 없었다. 다만 내가 용능의 기억을 복기하는데, 남자에 관한 기억이 유독 선명했다는 사실이 마음을 잠시 뻐근하게 만들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2호선 외선순환부터 신분당선까지 두 시간가량 사람들 사이에서 살 부대끼고 가는 것만큼 지독한 일이 없었다. 여름이면 지하철의 좁디좁은 객실에서 풍기는 미묘한 냄새는 극대화됐는데, 그건 쾌쾌하면서도 시큼한 냄새였다. 악취를 견디고 역내에서 빠져나오면, 묵직하게 몸에 내려앉는 습도를 이겨내야 한다. 분당역서부터 도보로 10분 정도 걸어야 비로소 사무실이었다. 높고 낮은 건물들이 줄지어 보이는 익숙한 출근길 정경을 보면 여름의 용능이 그리웠다. 여름은 분명 끔찍한데, 용능의 여름은 눈부셨던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족히 20분 정도 버스를 타고 들어 가야 나오는 펜션을, 버스가 가드레일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느낌이 들던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를 말이다. 여전히 멀미가 올라오는 느낌이 생생했다. 입안에 저릿한 신맛이 감돌았다. 탁상용 미니 선풍기 바람 강도를 올렸다. 더위를 먹었을 땐 머리를 선선하게 해야 한다.

 

***

 

   펜션 거실 구석에 짱박혀있던 선풍기를 화장실 문가 앞으로 끌어왔다. 약풍이 머리칼을 흔들었다. 아, 살겠다. 내 예측은 항상 반쯤 맞고, 나머지 반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는 했는데, 이번에도 역시나였다. 동아리 엠티라고 했던가. 밤늦게까지 펜션 뒤편 족구장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오싹하긴 했어도, 체크아웃할 때 음료수까지 건네며 싹싹하게 구는 것이 그래도 정신머리는 있는 애들이구나 좋게 봤는데 복병을 변기 밑에 숨기고 갔을 줄은 예측하지 못했다. 변기통에 대체 뭘 들이부어서 소변조차 내려가지 않았는지, 누런 변기통 안을 멀거니 쳐다봤다. 꽉 막힌 변기가 도통 뚫릴 생각을 안 했다. 뭐가 더 역류할지 모르는 변기 구멍을 애써 외면하고, 뚫어뻥을 옷걸이 방향으로 고쳐잡았다. 뚫어뻥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나를 위해 사장님이 손잡이 부분에 구부린 옷걸이를 달아 특별히 개조한 것이었다. 죽어도 옷걸이로 뚫고 싶진 않았는데…. 변기를 꽉 막아놓은 무언가가 서서히 으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막힌 변기통을 기어코 뚫고, 락스 묻힌 솔로 변기통 주위를 박박 닦았다. 이 빌어먹을 펜션 화장실 냄새는 영원히 못 잊을 것 같았다. 강렬한 락스 냄새 사이로 오래전에 낀 물때의 비린내가 섞여든 묘하게 인위적인 냄새를 말이다.

 

   동아리가 남기고 간 간밤의 흔적을 말끔하게 치워내고 1호실에서 나오니, 어느새 시간은 정오를 넘어가고 있었다. 관리소 방까지 총 4개의 독채가 있는 펜션이었고, 그중 내가 쓰는 관리소 방이 가장 작았으며 1호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내일 2호실 가족만 체크아웃하면 펜션은 오롯이 나의 차지였다. 성수기라면 모를까. 시내완 걸어서 30분 언저리로 걸리는 이 펜션은 싼 방값만 빼면 매력이 전혀 없었다. 휴가철이라기엔 아직 이르기도 하고, 곧 있으면 스콜 같은 비가 내리는 장마철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은 그나마 용능으로 오는 사람들도 용능해변 근처에 몰린 숙박촌에 머무를 게 뻔했다. 오후에 비 소식 있다더니, 하늘이 어두침침했다. 제아무리 못 볼 꼴을 봤어도 속은 재깍 출출해졌다. 그래도 으깨지던 감각은 손끝에 너무 생생하게 남아서 대충 식사로 때울 만한 것을 생각하다 어제 마지막 남은 라면을 동아리 회장에게 빌려줬다는 사실을 떠올랐다. 돌려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당장 해결할 점심부터 앞으로의 끼니까지 생각하면 성가셔도 시내에 다녀와야 했다. 2호실 가족은 오전 느지막이 나갔으니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별일이 생길 리 없었다. 관리소 문 안쪽으로 붙은 버스 시간표를 살피며 신발장 위에 아무렇게 굴러다니는 동전을 챙겼다. 정류장까지 설렁설렁 걸어 나가면 딱 맞았다.

 

   족히 20분은 내리막을 타고 쭉 걸어야 어설픈 아스팔트 도로가 펼쳐졌다. 그쯤에서 가드레일의 끝과 허술한 버스 표지판이 쓰러질 듯 세워져 있는 정류장이 나왔다. 느린 걸음으로 꽤 걸었을 때 즈음 관자놀이를 타고 미끄러지는 땀에 소름이 끼쳤다. 이미 인중엔 땀이 맺혀 짭조름한 향이 은은하게 뇌를 울렸다. 바다 마을 근처라 그런지, 땀이 유난스럽게 짰다. 어찌할 수 없이 나오는 욕을 씹었다. 묵직한 공기가 어깨를 지그시 누르는 기분이었다. 흙길의 내리막에서 작은 사장으로 빠지는 지름길로 발을 틀었다. 질퍽한 사장을 좀 걷다 보면 마른 모래가 나오고 곧 이름도 없는 바다가 펼쳐졌다. 번화한 느낌 없이 한가로운 바다였다. 튜브나 파라솔 따위를 빌려주는 간이 상점이 있고, 그 옆으로 좀 더 걸으면 이동형 샤워장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월요일이라 그런지 유독 더 사람이 없었다. 바다는 상쾌하게 푸르고, 모래 바닥은 푹신하면서도 뜨끈했다. 쪼리 사이로 모래가 끼었지만 이쯤은 정류장에서 털어내면 그만이었다. 사장의 길이 점점 좁아지고, 자갈밭을 타고 올라가면 마침내 가드레일의 끝이 나왔다.

 

    곧 쓰러질 법한 정류장 표지판 옆으로 놓인 벤치에 털썩 앉았다. 핸드폰 시계를 보니 오 분 정도 이르게 도착한 셈이었다. 더위에 혼미한 머리를 두어 번 털고 우중충한 하늘을 봤다. 한참 멍하니 고개를 쳐들고 있는데 클락션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버스라기엔 소리가 좀 작은데, 치켜든 고개를 바로 하니 새하얀 스파크가 서 있었다. 썬팅된 조수석 창가가 이윽고 스르륵 내려가더니 검은색 티셔츠 차림의 남자가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길 좀 잘 아세요?”

 

    해사하게 웃은 표정이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말을 고르는데 해사한 미소는 말을 덧붙였다. 지금 삼십 분째 이 도로에서 벗어나고 있질 못하고 있단다. 내비는 둬서 뭐 하는지 눈초리를 가늘게 뜨고 바라보는데 스파크 뒤로 마을버스가 올라오고 있었다. 작은 마을버스가 다 우람해 보일 지경이었다. 남자는 묵을 곳을 찾고 있어서 그런데 일단 타주시면 안 되겠냐고 핸들에 손을 떼고 빌고 있었다. 버스는 뒤에서 클락션을 울려대고, 나는 떠밀리는 심정으로 조수석 문을 열었다. 남자는 내가 조수석에 올라앉자 운전석 창문을 열고 죄송하다고 소리치곤 돌아봐 나를 향해 웃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맑은 웃음이었고, 티셔츠는 감색이었다.

 

 

    제 차에 탄 것마냥 뻔뻔하게 시내로 나가자고 했는데, 남자는 당황한 기색없이 끄덕였다. 그가 내비 앞에서 주저하자 나는 용능터미널로 목적지를 찍으라고 했다. 차 안의 시원한 공기가 머리칼 사이를 신선하게 했다. 남자는 묵묵했고, 나는 부러 뜬금없는 질문을 뱉고 싶었다.

 

“근데, 나 길 잘 알게 생겼어요?”

 

   남자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들어오며 평온한 눈매가 어그러졌다. 남자는 잠깐 핸들을 건반 치듯 두드리더니 이내 미소를 띠었다. 웃으면서 접히는 눈가 주름이 고양이 장난감 같았다.

 

“그렇게 멀리서 얼굴이 어떻게 보이겠어요.”

“그게 아니라. 다짜고짜 사람을 태우냐고요.”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그치만 제 친구가 지방으로 여행 가면 정류장에 있는 사람 열 중에 아홉은 지역주민이랬거든요.”

 

    아, 이해할 만하다가도 용능에 딱 하나 있는 시내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여기로 여행을 온 건지 의아했다. 남자는 태연해 보였다. 남자가 핸들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딴생각을 하다가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까 길도 잘 알게 생겼네요. 뭔가 행색이.”

   남자의 말을 듣고 괜히 까치집 진 머리부터 늘어난 티셔츠, 모래알 떨어지는 쪼리까지 너무 적나라하게 느껴져서 턱을 매만졌다. 남자는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무언가를 무용하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시내로 가는 길 내내 우리는 끊길 듯 끊이지 않는 대화를 나눴다. 대개 내가 먼저 질문을 던지면 남자는 반문하는 형식이었다. 이름이 뭐냐는 물음에도, 나이는 어떻게 되냐는 질문에도 말이다. 나도 모르게 질린 표정을 지었을 때가 되어서도 남자는 허허실실 웃으며 그쪽은 이름이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남자가 괘씸해서 뭐일 것 같아요? 그대로 되물었는데 남자는 많이 웃긴 듯 ‘크크’ 소리가 나게 웃었다. 남자는 고심하는 척하더니 용능? 이라는 터무니없는 답을 내놨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남자는 자상하게 눈을 맞추다가 금방 고개를 돌리고 핸들을 두드렸다. 그러고선 내 질문에 늦은 대답을 내놨다. 특이한 화법이었다. 나는 남자의 이름을 되뇌었다.

 

    용능까진 기차를 타고 와서 터미널이 역사 바로 옆인지는 미처 몰랐다고. 남자는 시내에 접어들면서 말을 꺼냈다. 티없이 놀란 표정이었다. 나는 어디서 왔냐고 물었는데 남자는 용인에서 왔다고 했다. 마침 내비는 도착지에서 안내를 종료했고, 나는 역사 뒤편으로 빠져서 용능시청 앞에서 좌회전 해달라 말했다. 남자는 순순히 따랐다. 하나로 마트 주차장으로 들어와 내가 안전벨트를 풀자 남자는 쭈뼛거렸다. 어찌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그런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텅빈 펜션에서 누릴 당분간의 온전한 여유를 미루어 생각했다. 그걸 놓친다는 게 아쉬웠지만, 남자 한 명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일단 내리라고 말했다. 내가 펜션에서 일하는데 빈방을 줄 테니 장만 보고 가자고 설명하니 남자는 얼떨떨한 듯 보였다. 내가 좀 재촉하자 남자는 빠릿하게 벨트를 풀고 일어섰다. 앉아있을 땐 몰랐는데 일어선 남자는 멀대 같았다.

 

“우와, 나 진짜 운 좋다. 그런 것 같죠?”

 

   남자가 잔뜩 신난 채로 물었다.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방정맞게 보일 법도 한데 말씨나 몸짓이 워낙 느려서 천진해 보였다.

 

 

    본인도 챙겨온 게 없어 끼닛거리를 좀 사야 한다며 남자가 자연스럽게 카트를 끌었다. 내가 라면 다섯 묶음을 넣으면 남자는 볶음용 닭 한 마리를 넣었고, 군것질용 과자를 집으면 이것도 먹어보라며 젤리까지 얹어줬다. 그런 식으로 장을 보다가 내가 찌개용 두부를 고르는 새에 남자는 카트를 두고 음료 코너를 둘러보고 있었다. 나는 놓고 간 카트를 끌고 남자에게 다가섰다.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었다. 남자는 콜라를 들고 있었다.

 

“이거랑 아이스크림이랑 먹으면 부글부글 끓잖아요. 한 번 해볼까요?”

“방에서 할 건 아니죠?”

“당연히 그건 아니죠.”

 

    남자는 크크 웃었다. 그럼 한번 해보라고 했더니 남자는 아이스크림 뭐 좋아하냐고 물어왔다. 나는 대충 투게더를 사라고 답했다. 남자는 휙 고개를 돌려보더니 아이스크림 매대로 성큼 걸어가 투게더를 꺼냈다. 나는 남자를 따라붙었다.

 

   남자가 장본 걸 몽땅 계산했다. 나는 당장 내 몫만큼 주겠다고 주머니를 뒤졌는데 지갑이 나오질 않았다. 남자는 말 없이 웃고 있다가 커다란 봉지 두 개를 양손에 쥐고 마트를 나섰다. 나는 민망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잘 나가다가 멈칫한 남자의 등 뒤에 바투 붙어 펜션 가서 돈을 주겠다고 했다. 그건 괜찮은데 비가 오네요. 남자가 말했다. 나는 그제야 비가 바닥으로 바늘처럼 예리하게 내리꽂히는 바깥을 봤다. 스파크는 서 있는 곳 가까이 주차돼 뛰어가면 살짝만 젖을 거리였다. 나도 모르게 나 진짜 운 좋네. 혼잣말을 내뱉었다. 남자는 우리 진짜 운 좋죠. 라고 살갑게 대꾸했다.

 

 

   스파크에서 비 맞은 머리와 어깨를 가볍게 털고 몸에 힘을 쭉 풀었다. 기운이 쪽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내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남자는 그 소리를 듣고 멈칫한 채 바라보더니 이내 차분히 근처에 패스트푸드점 있으면 드라이브 쓰루를 들르자고 했다. 나는 손사래를 쳤는데, 남자는 들어줄 생각이 없었는지 이미 내비로 가까운 패스트푸드점을 찾아 찍고 있었다. 결국 나는 남자의 옆에서 햄버거를 씹었다. 내가 햄버거를 다 먹을 때까지 해안도로를 빙빙 돌아주는 남자에게 가끔 감자튀김을 권했는데 다행히 남자는 곧잘 받아먹었다. 문득 나는 이 호의가 의심스러워 남자를 팩 쳐다봤다. 그러든 말든 남자는 평온해 보였다.

 

“혹시 어디 쫓기는 건 아니죠?”

 

   남자는 또다시 크크 웃었다. 도망은 맞긴 한데….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내가 햄버거를 먹다 말고 충격받은 눈으로 남자의 옆태를 바라보자 남자가 이번엔 으하하 웃었다.

 

“여름휴가 온 거예요. 대신, 아무것도 없이 왔죠. 원래는 내비도 안 써보려고 했는데.”

“혹시 돈도 없는 건 아니죠?”

 

   남자가 ‘아무것도 없이’를 특별히 강조해 나는 설마 이제 방 빌릴 돈도 없는 건지 걱정이 앞섰다. 신세는 질대로 지고 있으면서 염치없는 물음이었다.

 

“왜요? 없어 보여요?”

“그건 아니죠. 지금껏 다 그쪽 돈만 썼는데요.”

 

   남자는 미소 짓곤 괜히 백미러로 후방을 주시하며 딴청을 피웠다. 나는 본격적으로 자세를 틀어 남자를 바라봤다.

 

“그래서 왜 아무것도 없이 왔어요?”

“그냥, 궁금해서요. 바람과 천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지 증명하고자?”

 

   남자는 눈썹을 잔뜩 찌푸리곤 진지한 듯 말했다. 나는 이 말이 회심의 농담인지, 진심인지 헷갈려서 웃지도, 정색도 못 하고 있는데 남자는 슬쩍 내 얼굴을 보더니 으하하 웃었다. 얼굴이 이도 저도 아니게 미묘하다며 진짜 신기한 표정이라고 했다. 나는 대충 따라 웃었다. 햄버거를 먹으면서 차는 천도 바람도 아니지 않나?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면 차는 렌트한 거 아녜요?”

내가 넌지시 물었다.

“맞아요. 기차역 앞에 정처 없이 서있었는데, 어떤 아저씨 손에 붙들려서…눈 떠보니까 빌리고 있던데요.”

 

   남자의 사연에 나는 기가 막혀서 코웃음을 치다가, 차는 바람도 천도 아닌데 어떡하냐고 가볍게 물었다. 남자는 잠시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음, 앓는 소리를 냈다. 남자는 이윽고 핸들을 두드렸다. 나는 그게 꼭 남자의 첫마디처럼 들려서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의 말이 머쓱하니 이어졌다.

 

“그러게요. 명제부터 틀렸네.”

“…그래도 차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순 있다는 결론이 도출됐잖아요.”

  나는 괜히 미안해져서 고개를 숙였는데, 남자는 글쎄요. 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에요. 일리 있는 반박이었어요. 그것도 다 증명의 일환이죠.”

“연구 목적이 뭔데요? 다시 짜줄게요.”

 

   남자는 고심하는 듯했다. 그러면 용능 씨는 용능에 왜 왔어요? 그것부터 알려주면 나도 말할래요. 남자가 말했다. 나는 손에 꾹 쥐고 있던 햄버거 포장지를 구겼다. 일단 내 이름은 용능도 아닐뿐더러, 별 대단치도 않은 이유였기에 선뜻 입 열기를 주저했다. 남자는 응시하던 정면에서 고개를 틀어 나를 바라봤다. 어차피 객지에서 만난 인연이니까, 우리 편하게 말해볼까요? 나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얘기는 ‘바닷마을 펜션’에서 하자고 내비를 찍자, 남자는 만족스러운 듯 방실 웃었다.

 

*

 

“몇 박 며칠이에요?”

“음…. 1박 2일이 최대겠죠?”

“하긴 오늘 월요일이니까요. 돌아가서 출근도 해야겠네요.”

“그래도 급성 장염이라고 말하면 회사에서 오지 말라고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몇 박이에요.”

“마음은 4박 5일인데…. 1박 2일로 했다가 후회하면 어떡하죠?”

 

   그러면 나중에 연장해줄 테니까 일단 1박 2일로 해요. 말끔하게 정리해주니 남자는 아무래도 그게 좋겠다고 답했다. 나는 여러모로 신세 진 게 많으니 방값은 따로 안 받겠다고 했다. 사장님도 모르게 일부러 장부도 안 썼다. 나는 신발을 다시 꿰어신고 3호실로 앞장섰다. 묵는 방 중엔 가장 작기도 했고, 여차하면 달려오기도 쉬운 방이었다. 대충 현관 앞에 짐을 내려놓는 남자에게 간단히 방을 안내했다. 거실 티비 옆에 있는 문은 화장실이고, 샤워용품과 수건은 다 구비되어 있으며, 그릇이나 냄비 같은 물품은 주방 찬장에 있고, 침대는 따로 없으니 옆에 보이는 빌트인 장롱에서 이불 꺼내다 쓰면 된다고 지침대로 읊었다. 그러고 나가면 되는데 불안감이 들었다. 오지랖 같단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고개를 빼서 화장실을 구경하는 남자를 이미 불러 세운 뒤였다.

 

“폰은 있어요?”

“폰 있긴 한데, 이게 공기계라.”

“웬 또 공기계예요?”

“폰에 의지할까 봐요.”

 

   내가 언짢은 표정으로 손을 내밀자 남자는 순순히 공기계를 내놨다. 내가 고등학교 입학할 때쯤 나온 제품이었다. 연락처에 내 번호를 입력하고 저장했다. 공기계를 넘겨받은 남자는 의아하게 바라봤다. 무슨 대로변에서 번호라도 딴 사람 같아서,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낯부끄러워 발끝을 문가로 급히 돌렸다.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티비 옆 공유기에 있어요. 무슨 일 있으면 메신져로 연락하라고요. 불안해서. 아침에도 변기 뚫었거든요.”

 

  새초롬하게 말한 것 같다는 생각에 쑥스러움이 더 커져서 사족을 길게 붙였다. 남자는 알겠다고 했다.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모로 고분고분한 인간이었다.

 

 

   일정을 마친 2호실 가족이 돌아온 저녁쯤, 메신져가 울렸다. 사고 친 건 아니고, 저녁을 같이 하지 않겠냐는 물음이었다. 아주 잠깐 낯선 이름에 멈칫했다가 남자라는 것을 깨닫고 금방 메신져창을 들어갔다. 3호실로 지금 넘어가겠다고 답했다. 이어서 알겠다고 답장이 왔다. 딱딱한 문자 사이로 크크,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문을 나가니 남자는 3호실의 문을 연 채로 손을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모기 다 들어갔겠네. 내일 어딘가는 퉁퉁 부어서 모기향을 달라고 할 남자를 상상하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남자는 왜 웃냐고 물었는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저녁상은 닭볶음탕을 중심으로 오밀조밀 잘 차려져 있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며 잡다한 얘기를 나눴다. 보통 내 쪽에서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 과정에서 남자가 입사 1년 차 신입사원이고, 용인으로 출퇴근하며, 아무 계획도 세우질 않고 와서 뭘 해야 할지 고민한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용인? 놀이공원 다녀요? 나는 남자가 당연하게 반문하리라 짐작하고 장난스레 내뱉은 질문에 남자는 아니라고 재깍 부드럽게 답해줬다. 놀이공원은 아니고, 반도체 연구해요. 나는 닭다리를 잡고 잘게 뜯는 데 열중하다 남자를 바라봤다. 하얀 작업복을 입고 있을 남자를 상상했는데 꽤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용능 씨는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데요? 남자의 질문이 이어졌다. 나는 쇠젓가락을 씹으며 속으로 달을 셌다.

 

“대충 삼 개월 정도 됐나 봐요.”

“왜 왔는지 물어봐도 돼요?”

“그냥…. 취업 때문에 정신없다 보니까, 갑자기 혼자 있고 싶어서.”

 

  내가 생각해도 사춘기 청소년이 할 법할 말이라 느릿하게 문장을 잇다가 결국 쑥스러워 고개를 밥그릇으로 처박았다. 남자가 숨죽여 웃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생각도 좀 정리하려고 온 거예요.”

“얼마큼 정리했는데요?”

“정리는 모르겠는데, 그냥 아무 생각도 없어요”

“크크, 결벽증이네요.”

 

  남자의 실없는 말장난에 나는 맥빠지는 웃음을 뱉다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입안에서 씹던 것을 모조리 삼키고 나서 입을 뗐다. 남자는 그때까지 나를 가만 기다렸다.

 

“그러면 그쪽은 왜 왔는데요?”

“저도 생각 정리. 아, 이게 연구 목적이었어요.”

“대체로 무슨 생각 정리였는데요? 그, 나는 방향성을 새로 짜줘야, 하니까요.”

“……반도체는 언제까지 팔릴까요?”

남자는 뜬구름 잡는 소리를 했다.

“글쎄요…. 디지털 산업이 계속되는 한 영원히?”

“나도 영원히 만들게 될까 봐 갑자기 회의감이 들어서 와봤어요.”

“뭐…. 그러면 중간에 빠지면 되죠.”

 

  남자도 어느덧 젓가락을 내려놓고 대화에 심취해 있었다. 남자는 혼자 끄덕이더니 그것도 일리가 있네요. 라고 말했다. 이어서 모종의 후련함이 생겼다고 평을 남겼다. 나는 뿌듯해져서 밥을 크게 한 숟갈 떴다.

 

“그러면 대학생이에요? 용능 씨는?”

“네, 3학년. 나도 도망쳤어요. 근데 애매하게 도망쳐서 혼자 코스모스 졸업하게 생겼어요.”

“저도 코스모스 읽고 물리학과 들어가던 시절이 있었는데.”

“코스모스가 여러모로 죄가 많네요.”

 

   뚱딴지같은 소리에 무심하게 대답하니 남자가 으하하 웃었다. 용능 씨 진짜 웃긴다고 했다. 남자가 웃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용능. 둥글한 글자들이 남자의 울림 있는 음성을 타고 나오는 게 꽤 마음에 들었다. 닭볶음탕 사이 잘 익은 감자를 반 갈라서 남자에게 건넸다. 마지막 남은 감자라서요. 남자는 고맙다며 받아먹었다.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바다 보러 갈래요? 남자의 팔이 몸 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남자는 내가 쌓아둔 빈 그릇을 거둬 싱크대로 향했다. 데려가 주면 좋죠. 지금 갈까요? 남자가 고무장갑을 끼며 말했다. 이윽고 그릇끼리 부딪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방을 메웠다. 아까 창문을 슬쩍 열어 놨더니 오후에 모인 빗물이 지붕에서 추락하는 소리가 틈틈이 섞여왔다. 왠지 몸이 나른해지는 기분이라서 나는 남자 옆으로 서서 그가 비누칠 해놓은 그릇을 물로 씻었다. 남자는 성급하게 구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더니 광대를 볼록하게 세웠다.

 

“지금 설거지 안 하면 닦기 힘드니까, 빨리 해치우고 갑시다.”

 

  내가 입을 삐죽이면서도 뽀득 소리 나게끔 그릇을 씻어대자 너무 빨라서 그릇 깨지겠어요. 남자는 토를 달았다. 그러곤 고무장갑 낀 손으로 튀어나온 입을 넣어줬다. 나는 물기 흥건해진 입가를 소매로 벅벅 닦고, 고추기름이 잔뜩 낀 닭볶음탕 그릇을 광나게 씻었다.

 

 

   빠른 걸음으로도 십 분은 내려가야 한다고 하니 남자는 걷는 걸 좋아한다며 냉동고에서 꽝꽝 얼어버린 아이스크림과 콜라를 양손에 야무지게 챙기고 뒤를 쫄래쫄래 쫓아왔다. 땅으로 듬성듬성 난 풀이 물을 머금고 축축하게 발목을 엉겨 붙었다. 장마철 공기는 눅눅하고, 하루살이들은 피부를 쏘는데 걸음은 가벼웠다. 어디 버리고 가도 모르겠다고 남자에게 겁을 줬더니, 남자는 못 버릴 거 안다고 자신감 있게 말했다. 그게 미워 보이진 않는데도 콧잔등을 부러 구기면서 으, 별로라고 했다. 사장으로 이어지는 좁은 비탈길을 달리듯 미끄러져 단숨에 내려갔다. 남자는 멈추지 않은 채 그대로 검은 바다 가까이 다가섰다. 나는 천천히 뒤를 따랐다. 남자는 밀려드는 파도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빼며 놀았다. 빌려줄 신발은 없다고 핀잔을 줬더니 그래도 바다에 오면 이건 꼭 해야 한다고 했다. 그걸 두어 번 반복하다가 흥미를 잃은 듯 진작에 모래사장에 앉아있던 내 옆자리로 털썩 주저앉았다. 남자는 모래는 따듯한데 이상하게 더위가 물러가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이열치열이라고 하죠. 나는 짐짓 전문가처럼 답했다. 남자와 나는 밀려들었다 물러나는 파도를 보며 넋을 놓았다.

 

“근데 아직 회사원들 휴가 기간 아니지 않아요?” 내가 먼저 정적을 깼다.

“맞아요. 그래서 월차 쓰고 왔어요.”

“휴가 기간까지 좀 기다리지 그랬어요.”

“내가 내일 가서 아쉽구나.”

 

  나는 겸연쩍어 남자의 시선을 피해 바다의 끝없는 끝을 바라봤다. 남자는 짓궂게 웃었다. 나는 무릎에 고개를 살짝 파묻은 남자의 옆태를 가자미 눈으로 훔쳐봤다. 관자놀이부터 귓바퀴까지의 선이 불그스름했다. 더운가 싶어 내가 끌어안고 있던 콜라를 볼에 대줬다. 남자는 소름이 돋는 듯이 부르르 떨고 어깨를 움츠렸다가 폈다.

 

“안 그래도 신입이 벌써부터 쉬려고 그런다고 눈총 좀 받았어요.”

“그러니까 1박 2일밖에 못 머물죠.”

“그러니까요. 객기도 좀 똑똑하게 부릴걸.”

 

   수긍이 왜 그렇게 빨라요. 내가 어이없어 웃자 남자는 내 콧잔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여기 주름 생기네요. 키키. 남자가 내 웃음소리라며 따라 했다. 나는 뭔가 괘씸해서 그러는 그쪽은 크크. 이렇게 웃거든요. 대꾸했다. 그럼 우리 합쳐서 ‘키키크크’네요. 남자는 개의치 않은 듯 응수했다. 그걸 왜 합쳐요. 남자에게 핀잔을 줬다.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웃음은 갈무리하지 못했다. 한참을 쓸모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남자는 파묻은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나를 뚫어져라 보더니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해사함을 보자 나는 어딘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고마워요. 같이 다녀줘서. 진짜 막막했는데, 하마터면 도착하자마자 집 갈 뻔했어요.”

“그러게 누가 여행을 계획도 없이 와요.”

“여행 정도는 계획 없어도 될 줄 알았죠. 어쨌든 지금까지 완벽하잖아요.”

 

  궤변 같으면서도 묘하게 일리는 있는 것 같아 나는 별다르게 대꾸하지 않았다.

 

“나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닌데, 답답했죠. 그…. 지금 입사 1년차 병 한창이라 그래요. 그러고 보니 용능 씨는 한창 대학교 3학년 병이겠네요.”

“우리 중환자네요. 근데, 입사 1년차 병은 뭔데요?”

“처음 입사했을 때 의욕 다 상실하는 거요. 용능 씨는 들어가고 싶은 데 있어요?”

“글쎄요. 딱히 없는데, 뭐할까요 나?”

“뭐 배우고 있는데요?”

“마케팅이요.”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는 남자의 눈이 차분했다. 미미하게 눈가의 주름이 점점 짙어졌다. 정적이 꽤 오래 틈을 채워서 나는 모르겠으면 마요. 라고 장난스레 응수했다. 남자는 객쩍게 코끝을 긁었다. 아, 뭐 말해줄까 하다가 말장난하려고 했는데. 남자가 아쉬운 듯 굴었다.

 

“혹시 반도체 말고 원래 하고 싶던 거 있어요?”

“저요? 저는 그냥 놀고 싶었죠.”

“뭐야. 나는 뭐 이루지 못한 대단한 꿈이라도 있는 줄 알았잖아요.”

“크크, 굳이 따지자면 반도체 공학으로 석사 따고 싶진 않았어요.”

“대학원까지 갔었어요? 대박.”

“웬만하면 가진 마요.”

“안 가려고요. 그럼 원래 뭐 하려고 했는데요?” 나는 말미에 키키, 웃었다.

“음…. 천체물리? 아, 이거 아무한테도 말 안 한 건데.”

“영광이네요.”

 

   남자가 으스대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치자 남자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굶어 죽을까 봐 안 갔어요, 진짜 찌질하죠? 남자가 물었다. 별로요. 나는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남자는 잠깐 먼 곳을 망연히 바라봤다. 나도 사실 잘했다고 생각해요. 뭐예요. 뭘 배웠어도 안 배우고 싶었을걸요? 용능 씨도 대학원 가서 한번 느껴봐요. 나는 남자를 경악스럽게 바라봤는데, 남자는 얄밉게 어깨를 으쓱였다. 용능 씨는 진짜 하고픈 거 없어요? 남자가 다시 물었다.

 

“저는 그냥 하던 대로 마케팅하려고요. 다른 길로 빠질 구석도 없고.”

“왜요?”

“그냥 무난해서….”

말끝을 흐렸다. 이거 괜히 쑥스럽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맞네요. 어차피 먹고살려고 하는 일인데. 그럴수록 가벼우면 좋죠.”

“그럼 반도체도 가볍게 생각해요.”

 

  나는 짓궂게 남자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남자는 꼭 내 행동을 반사하듯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남자의 뺨이 시선 가까이 붙자 나는 무안해서 헛기침하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남자는 무심해 보였다.

 

“안 그래도 아까 감명받았어요.”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열없는 마음을 되레 과장되게 꾸며냈다. 입꼬리를 자신만만하게 올리고 조금 전 남자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남자는 방글 웃었다. 휘어지는 눈꼬리가 곡선을 그렸다. 쭉 선을 뺀 듯 남자의 예리한 눈꼬리가 웃으면 말리어 둥글어지는 거에 꽂혀서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봤다. 남자는 여념에 빠져서 신경 쓰지 않았다. 나도 남자를 마음껏 관찰했다. 남자의 꾹 다문 입가로 보조개처럼 접히는 주름이 근사하다고 생각할 참에 남자가 손가락으로 무릎을 가볍게 두드렸다. 남자의 첫마디였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무릎을 바라봤다.

 

“용능 씨도 빠질 구석 하나만 마련해놓으면 되겠다. 그렇죠?”

“……알겠어요, 근데, 평소에 감성적이란 얘기 많이 듣죠?”

“그렇게 티 나요? 나 사실 철학과도 가고 싶었는데.”

“고대에 살았으면 아리스토텔레스였겠어요.”

 

   남자는 으하하 웃었다. 내가 말했는데도 웃겨서 따라 웃었다. 아쉽다. 좀만 일찍 태어날걸. 남자가 말했다. 근데, 아이스크림 다 녹았겠어요. 내가 고갯짓으로 남자의 손아귀에 들린 투게더를 가리키자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 나도 으하하 웃었다. 아이스크림은 묽은 알갱이를 품은 채 거의 물처럼 녹아있었다. 휘휘 돌리며 알갱이가 풀어지는 걸 남자와 나는 고개를 바짝 들이밀고 꽤 오랜 시간 바라봤다. 큰 알갱이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더니 묽은 액체 사이로 스며들었다. 남자는 다 풀어졌다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걸 관망하며 재밌어했다.

 

***

 

   티스푼으로 커피믹스가 슬슬 풀어지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잠이 솔솔 쏟아졌다. 도저히 자력으론 이겨낼 수 없는 졸음이 밀려와 커피를 타러 간 탕비실엔 이미 인사팀 박 대리가 사원 한 명을 붙들고 자신의 휴가 계획에 관해 떠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막 나의 기척을 느꼈는지 박 대리가 커피? 라고 물어왔다. 어색하지만 예의 차린 미소를 지어 네. 라고 답하자 박 대리는 다시 내게서 시선을 거뒀다.

   연차까지 끌어모아 비행기 타고 해외로 떠나겠다느니, 배낭만 메고 땅끝까지 가보겠다느니 하는 박 대리의 말들이 이어졌다. 나는 풀어지고 있는 커피에서 눈을 떼고 이른바 박 대리의 끝내주는 여행계획을 듣는 사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비스킷 몇 개를 집어 들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곧 아주 눈치껏 탕비실을 빠져나갔다. 박 대리는 아직 미처 못 말한 계획이 있는지 쩝, 입맛을 다셨다. 하필 나는 박 대리 시선이 쉽게 닿는 곳에 있었고, 박 대리는 커피를 들고 어정쩡하게 서있는 내게 가까이 왔다. 불편하다고 느낄 때쯤 박 대리는 입을 열었고, 우리 신입은 휴가 계획 짰어? 짐짓 친근하게 물어왔다.

  나는 티스푼으로 믹스를 풀며 아니오. 라고 너스레 떨며 답했더니 박 대리는 원래 신입 때 처음 받은 휴가에서 깨달음을 얻는 법이라고 했다. 마케팅하려면 세상에 견문이 넓어야 한다는 지론까지 뻗어 나가자 나는 박 대리의 말끝이 흐려지는 순간 박 대리의 말을 끊고 가을 졸업까지 준비해야 돼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우는 시늉을 하며 적당하게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박 대리는 내가 머그를 들고 탕비실을 나서는 순간에도 휴가 순번까지 꽤 남았으니 조금 더 여유롭게 생각해보라 조언했고, 나는 사람 좋게 웃으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자리에 앉아서 상념에 빠져있다가 코레일을 접속해 갈 수 있는 기차표를 둘러봤다. 박 대리의 분부를 따르려던 건 아니고 박 대리가 얻었다는 그럴싸한 깨달음이 궁금했다. 결국엔 그 여행의 기억도 다 각색된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의문 말이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용능행 기차표를 찾고 있었다.

 

   남자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용능을 떠났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그 다음해에 있을 상반기 인턴 공채 준비와 2학기 복학을 계획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계획대로 행동하는 것인데도 왠지 모르게 나는 내가 용능에서 급히 도망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용능의 기억이 원한처럼 찾아오는 건가. 가끔 남자의 상황과 비슷해진 지금, 용능을 가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할 때가 있다. 남자도 박 대리처럼 신입 때 떠난 여행을 자랑하고 있을까? 남자를 떠올렸다. 기껏 타온 커피가 에어컨 바람에 미적지근하게 식어있었다.

 

***

 

   남자와 나는 사이좋게 몸을 대고 있어 뜨끈해진 콜라를 마셔보려다 둘 다 미적지근함에 몸서리를 쳤다. 나는 이제 펜션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다시 십몇 분을 걸어 펜션으로 돌아가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공포 영화를 볼 것을 약속했다. 이것 또한 낭만이라는 남자의 지론에 의해 생긴 계획이었다. 나는 관리소 방에서 잠옷으로 쓸 만한 옷가지를 얼른 챙겨 3호실로 건너갔다. 남자는 내가 말없이 건네는 옷을 받아들고 고맙다고 했다. 남자가 씻으러 들어간 사이 나는 이불을 깔고, 에어컨을 켜고, VOD를 틀었다. 남자는 알맞게 나와서 곧장 주방으로 향하더니 냉수를 건넸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우리는 새벽의 초입까지 영화를 보다가 피로와 졸음이 몰려와서 아마도 동시에 잠들었다. 그 모든 과정이 일상의 당연한 수순같아서 나는 아주 편안한 잠을 잤다.

 

   밥이 익어가면서 내는 군내에 잠이 깼다. 11시 가까운 시간이었다. 남자는 본인이 대신 2호실 가족 체크아웃을 도와줬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나는 잠이 덜 깬 눈으로 어떻게 했냐고 웅얼거렸는데, 남자는 용케 알아듣곤 눈치껏 했다고 말했다. 굳이 더 캐물을 필요는 없겠다는 이상한 확신이 들어서 나는 옅은 미소와 함께 잘했다고 답했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조금은 개운해진 정신으로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남자는 아침 먹으라며 재촉했다. 나는 지고지순하게 앉아서 수저를 들었다. 레토르트 짜장밥이 올라와 있었다. 남자는 어젯밤에 모기가 다리를 온통 뜯어놨다며 자그맣게 칭얼거렸다. 피가 맛있었나 보다. 라고 내가 짐짓 무심하게 굴자 남자는 속상한 듯 표정을 지으면서도 가려운 곳을 가볍게 때렸다. 밥도 맛있네요. 내가 말하자 남자는 자기가 여러모로 뜯어 먹기 좋은 구석이 있다고 대답했다.

 

“오늘 아침에 급성 장염 얘기했더니, 오늘 아픈 건데 내일 출근은 왜 못하냬요.”

“그게 통할 것 같았어요?”

“나름 회심의 아이디어였어요.”

   남자는 입을 삐죽였다. 나도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짜장 소스가 묻은 그릇을 공연히 긁어댔다. 그 마음을 한쪽으로 미뤄두고 나는 남자에게 몇 시 기차냐고 물었다. 6시 25분 차랬다. 마지막 날인데 뭐 할 거예요? 내가 물었다. 글쎄요. 그것도 용능 씨 손에 달렸는데. 남자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웃음의 끝 무렵엔 속상함이 보기 쉽게끔 미세하게 얹혀있었다.

 

“오늘은 사람 많은 바닷가 가볼래요? 용능해변?”

“음, 아뇨. 그냥 어제 갔던 바닷가 또 가면 안 돼요?”

“그래요. 그럼. 오늘은 좀 더 내려가서 방파제 쪽으로 걸어봐요.”

“거긴 무슨 해변이에요?”

“저도 모르겠어요. 워낙 잘 안 알려진 바다라.”

“아쉽네요. 기억하고 싶었는데,”

  남자는 벌써 심정이 영 껄끄러운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바닷마을 펜션이라도 기억해요. 나는 고의로 농담을 던졌다. 우연을 가장한 농담이었다. 남자는 기운을 차리려는 듯 눈썹을 한 번 들썩였다. 나는 남자의 빈 그릇까지 거둬 싱크대로 향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릇에 구멍을 뚫어버릴 것 같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각자의 일을 했다. 나는 손님들이 떠나간 2호실 방을 청소했고, 남자는 빌려 입은 옷을 빨래해서 족구장 네트에 정성스럽게 널었다. 날은 여전히 궂은 모양새였지만 말이다. 남자는 간소한 짐을 싸 뒷좌석에 실었고, 3호실 문 앞에 가만 쭈그려 앉아서 나를 기다렸다. 내가 2호실 청소를 끝내고 나오는 모습을 본 남자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마스터키로 2호실 문을 단단히 잠그고 이제 가보자고 남자에게 고갯짓했다. 남자는 금방 내게 다가왔다. 남자와 나는 발맞춰 해변으로 향했다.

 

   좁아지는 사장 끝은 도로로 향하는 자갈길 오르막과 테트라포드가 쌓여있는 콘크리트 평지로 나뉘어 있었는데 나는 남자를 콘크리트 평지 쪽으로 잡아끌었다. 우리는 말 없이 테트라포드 위로 넘실대는 바다를 보았다. 물길은 테트라포드를 기어코 기어오르지 못하고 그 밑을 부글거리며 끓다가 잠잠해지길 반복했다. 짜고 따끈한 바람이 불었다. 바닷가 와서 생선회는 구경도 못 한 남자의 여행이 웃겨서 조그맣게 키키. 거렸더니 남자가 눈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남자의 눈이 왜 웃어요? 라고 묻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웃기잖아요. 삼시 세끼 차려먹는 티비쇼도 아니고, 회는 구경도 못 해보고 가네요.”

“크크. 그러게요. 올라가서도 먹을 법한 음식만 먹었네.”

“만약 다시 오게 되면 용능해변 가서 회 좀 사 먹어요. 저기 유명한 횟집 있는데.”

“그렇게 할게요. 그 기억을 여기 방파제에 묶어두고 갈게요. 다시 오면 생각나게.”

 

   그래요. 내가 답했다. 남자는 테트라포드를 보니 무산된 일명 아‧콜 폭발 실험이 떠오른다고 했다. 나는 의아해져서 남자를 바라봤다. 테트라포드 밑으로 끓는 물이 꼭 그걸 연상하게끔 한다고 했다. 그러다가 제자리에서 멈춰서 그걸 유심히 바라보더니 왠지 이번 용능의 기억이 돌아가면 방파제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는데, 남자는 꽤 수줍었는지 무료해서 폭발해버리기 전에 막아줄 것 같다고요. 참. 이라며 장난 가득한 핀잔을 던졌다. 나도 지고 싶지 않아서 감수성 안 맞는다 진짜. 라고 답했다가 둘이 서서 키키크크. 웃어댔다.

 

“뭔가 이유 없이 복잡했는데 빠짐없이 말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남자가 말했다.

“왜였을까요?”

“모르겠네요. 우리가 서로를 아예 몰라서 그랬을까요?”

 

   남자의 말에 이어서 서울에 올라가서도 연락하라고 하려던 게 어딘가에 가로막혀서 차마 입밖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 말 대신 생각 정리는 성공했냐고 물었다. 남자는 고민하는 듯 일정하게 음, 소리를 내다 바뀐 건 별로 없는데, 이상하게 마음은 편해졌다며 해사하게 웃었다. 나는 왠지 그 웃음을 두고 보기 힘들어 테트라포드로 시선을 던졌다. 남자는 내내 감상을 뱉었고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내뱉으려다 말고 삼켜진 말이 목울대 한가운데를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산책하다가 펜션으로 돌아갔다. 남자의 기차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자는 스파크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기차역에 도착해 인터넷이 되면 문자를 남기겠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쉬이 움직이지 못하고 느릿하게 나아가던 차가 어느덧 펜션과 도로의 경계선을 넘었다. 나는 멀어지는 꽁무니를 밟지 못하고 펜션의 테두리 안에서 세차게 손을 흔들었다. 나와 웬만큼 멀어져 도로로 나간 차체의 차창 밖으로 고개가 빼꼼 나오더니 정말 고마웠어요! 마지막 인사를 했다. 나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어느새 사라질 때까지 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차가 완전히 사라진 뒤 네트에 널어놓은 옷가지를 걷어 관리소 방 현관에 대충 던져놨다. 그러곤 3호실을 청소했다. 이미 깔끔한 방을 굳이 한 번 더 치웠다. 인위적인 화장실 냄새를 위해 솔에 락스를 묻혀 바닥을 청소했다. 그 냄새가 공간을 가득 채우자 잠깐 머물렀던 사람도 금방 떠나갔다. 모기에 잔뜩 물린 팔뚝을 벅벅 긁었다.

 

***

 

   그러고 보니 이제 남자의 얼굴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선이 말끔한 얼굴에 웃으면 주름이 근사하게 지고, 눈매가 갈고리처럼 휘어지는, 키가 멀대같고, 말씨가 느릿하며, 차분한 음성 정도가 떠올랐다. 이름은 또 뭐였더라. 용능이던가. 그러다가 남자에게 용능은 정말 테트라포드가 되었을지 막연한 궁금증이 밀려왔다. 내게 용능은 테트라포드 밑에서 부글부글 끓던 아득한 물길인데…. 도착했어요. 남자의 마지막 메시지를 또다시 보았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남자에겐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공기계를 버렸을까? 그렇다면 남자는 용능 사이에 있던 나를 금방 잊었을 것이다. 나는 남자와의 채팅방에서 나갔다. 용능부터 부산, 강릉, 전주행 기차를 찬찬히 살폈다. 여기를 한 번 가볼까? 마우스 클릭질을 몇 번 하니 성공적으로 예매가 완료되었다는 창이 떴다.

 

   업무차 열어놓은 파일 뒤로 몰래 띄워놓은 코레일 창을 화면 좀 더 안쪽으로 끌어왔다. 나는 예매가 완료되었다는 코레일의 메시지창을 한참 바라보고 있다가 식은 커피가 차가워지기 전에 마침내 닫았다. 그러니까, 나는, 몹시 즉흥적으로, 가끔씩 부글부글 끓는 기억 하나쯤은 끌어안고 살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한 참이었다. 멋진 여름휴가를 위해선 오늘 주어진 일을 착실하게 마무리 지어야 했다. 나는 업무용 프로그램을 제외하고 모든 창을 종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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